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인 ‘자아 개념(self-concept)’은 여러 정보로 구성되어 있다. (취향, 습관, 지식의 양 등) 삶은 이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펼쳐진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자아 개념은 특별히 직업을 통해 많이 알 수 있다. 우리는 최소 하루의 약 62%를 직장일을 하며 보내는 데다가, 직장 외의 시간에 직업이란 꼬리표를 완벽히 떼고 있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매거진 B』의 발행인인 조수용 씨는 『Jobs: editor』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직업이란 근본적으로 나 자신의 존재 의미에 가깝다”고. 나는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무슨 개소린가…’싶었지만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현 직업은 어찌 됐든 내가 선택한 것이라는 점,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과 흘러가는 시간을 내 존재를 배제하고 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직업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나 자신이 함몰되거나 잊혀진다는 점이다.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표현처럼 일하는 대로 내 존재를 형성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타협을 하면서 자신을 방치하곤 한다.
소설 속 시간을 시간 순으로 재배열해보면 초반은 주인공 선이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선이는 음악하는 동료들에게 “뮤지션은 뭘 하는 사람이죠?”라고 묻는다. 이는 직업 탐구를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선이는 재능 있는 리스너에게 인정을 받은 데다가, 그를 통해 여러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질문은 뮤지션에서 예술가로 바뀐다. 좀 더 큰 범주로 넓혀졌다. 동료들은 선이에게 “예술가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거나 “예술가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에 동해 선이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목적은 진짜 예술가를 만나는 것. 의역을 조금 하자면 진짜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1년 간 여행을 하면서 선이는 형식 상에서 예술가의 범주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선이는 그들과 이질감을 느낀다. 현실에 꿈을 내준 사람은 둘째 치고, 인간적이고 대의적이면서 이타적인 환경미화원까지 만났지만 떠났다.
선이는 그들과 자신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가짜로 살기엔 나는 그들을 증오하며 인정하지 않았다. 진짜로 살기엔 나는 진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런 나 자신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짜의 면모를 지닌 사람을 만났지만 선이가 그를 떠난 이유는 자신이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말하는 절망이 떠오른다.
선이에게 필요했던 사람은 진짜 자체가 아니었다. 바로 스스로를 얽매는 습관에서 해방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사람이 해야였다.
해야는 선이가 가늠할 수 없는 자유의 사람이었다. 출입이 통제된 갑판 위에서 노래를 부르다 파도에 휩쓸릴 뻔하고, 얼룩말 옷을 입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싶다고 하는 등 어쩌면 보편적 기준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일 테다.
그렇지만 그녀의 생각은 깊이가 있으면서 심플했다. 사람들이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앞의 위기만 두려워한다는 점, 긍정을 기다리고 원하면서 사소한 불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 등에서 그녀는 깊이가 있었다. 동시에 가짜와 진짜를 논하는 선이에게 그럴 것 없이 분야가 다르다고 생각하면 편하다고 얘기하는 부분은 그녀의 심플함을 보여준다.
선이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심플함이었다. 그것이 그를 자유롭게 하는 장치였다. 선이는 예술가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해야는 “선아 거창한 걸 생각하지 마. 뱉은 말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할 수 있는 만큼의 말을 하면 돼.”라고 말한다. 선이의 높은 기준과 복잡한 생각을 단번에 녹여버린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은 토마토를 먹는 모습이다. 방울토마토를 먹기 전 “이건 말한 거고”라고 말하고, 먹은 후에는 “이건 지킨 거야”라고 말을 한다. 마치 콜롬버스에 관한 일화에서처럼 해야의 말은 계란을 깨뜨려 세운 느낌이다.
해야는 마지막까지 선이를 진정한 자유로 이끈다. 이미 직업에서의 존재를 해결했기에 선이에게 남은 건 존재에서의 자유였다. 선이는 은연중에 해야에게 의존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랑은 분명 그런 측면이 있다. 상대와 물리적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고, 심리적으로도 항상 같이 있고 싶은 마음. 그렇지만 잘 구별하지 못할 때 착각에 빠진 사랑은 서로에 대한 지배와 통제로 변질이 된다.
그런 미래는 책에 나오지 않지만 해야는 선이가 좀 더 자유로워지길 바란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매번 이야기한 말을 지킨다. 바다로 나가 바다 속으로 뛰어 드는 것. 자살처럼 보이지만 그만한 능동과 자유가 있을까 싶다. 이는 장강명 작가의 『표백』을 떠올리게 한다.
선이는 해야가 그렇게 떠난 후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낸다. 단순한 이별의 아픔도 고통스러운데 사별과 가까운 아픔은 존재를 무너뜨리는 힘을 지녔을 테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사람은 그 지역에 새로 정착한 “양이”라는 사람이었다. 해야와 함께한 장소의 이름대로 “작은 별” 카페를 만들던 선이의 노래와 분위기에 끌린 사람이다.
양이는 비중이 있으면서도 없지만 선이를 중심으로 둘 때 의미가 있는 시점을 제공한다. “카페는 곧 선이 씨 자신이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선이 씨가 카페 주인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카페가 선이였다 라는 표현은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견뎌낸 선이가 누구에게도 자기 개념을 종속 또는 의존하지 않은 결과를 표현한다.
양이는 선이를 보았을 때 이런 말을 했다. ‘그는 내가 싸우지 못한 부분과 혼자서 싸우고 있었다. 난 그를 응원했다.’ 확장해서 보면 존재의 자유는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반대로 그런 고통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존재의 자유를 누린다고 얘기할 수 없다는 의미다.
직업은 자아 개념을 풍성하게 알게 하는 도구다. 동시에 우리는 직업 외적 자아가 있다. 두 가지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나라는 존재의 소중한 일부다. 직업 자체에 집중하되 휩쓸리지 않는 것. 스스로 제한을 두지 않고 열려 있는 많은 가능성을 용납하는 것. 현실적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심플한 마인드가 필요하다.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을 역설로 넉넉히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아 개념을 일변도로나 누군가에게나 의존하지 않는 것. 어려운 길이지만 선이도 계속 그것을 해결해나가고 있고, 아마 이 책을 지은 이찬혁 씨도 완성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인 ‘자아 개념(self-concept)’은 여러 정보로 구성되어 있다. (취향, 습관, 지식의 양 등) 삶은 이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펼쳐진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자아 개념은 특별히 직업을 통해 많이 알 수 있다. 우리는 최소 하루의 약 62%를 직장일을 하며 보내는 데다가, 직장 외의 시간에 직업이란 꼬리표를 완벽히 떼고 있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매거진 B』의 발행인인 조수용 씨는 『Jobs: editor』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직업이란 근본적으로 나 자신의 존재 의미에 가깝다”고. 나는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무슨 개소린가…’싶었지만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현 직업은 어찌 됐든 내가 선택한 것이라는 점,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과 흘러가는 시간을 내 존재를 배제하고 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직업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나 자신이 함몰되거나 잊혀진다는 점이다.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표현처럼 일하는 대로 내 존재를 형성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타협을 하면서 자신을 방치하곤 한다.
소설 속 시간을 시간 순으로 재배열해보면 초반은 주인공 선이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선이는 음악하는 동료들에게 “뮤지션은 뭘 하는 사람이죠?”라고 묻는다. 이는 직업 탐구를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선이는 재능 있는 리스너에게 인정을 받은 데다가, 그를 통해 여러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질문은 뮤지션에서 예술가로 바뀐다. 좀 더 큰 범주로 넓혀졌다. 동료들은 선이에게 “예술가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거나 “예술가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에 동해 선이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목적은 진짜 예술가를 만나는 것. 의역을 조금 하자면 진짜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1년 간 여행을 하면서 선이는 형식 상에서 예술가의 범주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선이는 그들과 이질감을 느낀다. 현실에 꿈을 내준 사람은 둘째 치고, 인간적이고 대의적이면서 이타적인 환경미화원까지 만났지만 떠났다.
선이는 그들과 자신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가짜로 살기엔 나는 그들을 증오하며 인정하지 않았다. 진짜로 살기엔 나는 진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런 나 자신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짜의 면모를 지닌 사람을 만났지만 선이가 그를 떠난 이유는 자신이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말하는 절망이 떠오른다.
선이에게 필요했던 사람은 진짜 자체가 아니었다. 바로 스스로를 얽매는 습관에서 해방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사람이 해야였다.
해야는 선이가 가늠할 수 없는 자유의 사람이었다. 출입이 통제된 갑판 위에서 노래를 부르다 파도에 휩쓸릴 뻔하고, 얼룩말 옷을 입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싶다고 하는 등 어쩌면 보편적 기준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일 테다.
그렇지만 그녀의 생각은 깊이가 있으면서 심플했다. 사람들이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앞의 위기만 두려워한다는 점, 긍정을 기다리고 원하면서 사소한 불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 등에서 그녀는 깊이가 있었다. 동시에 가짜와 진짜를 논하는 선이에게 그럴 것 없이 분야가 다르다고 생각하면 편하다고 얘기하는 부분은 그녀의 심플함을 보여준다.
선이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심플함이었다. 그것이 그를 자유롭게 하는 장치였다. 선이는 예술가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해야는 “선아 거창한 걸 생각하지 마. 뱉은 말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할 수 있는 만큼의 말을 하면 돼.”라고 말한다. 선이의 높은 기준과 복잡한 생각을 단번에 녹여버린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은 토마토를 먹는 모습이다. 방울토마토를 먹기 전 “이건 말한 거고”라고 말하고, 먹은 후에는 “이건 지킨 거야”라고 말을 한다. 마치 콜롬버스에 관한 일화에서처럼 해야의 말은 계란을 깨뜨려 세운 느낌이다.
해야는 마지막까지 선이를 진정한 자유로 이끈다. 이미 직업에서의 존재를 해결했기에 선이에게 남은 건 존재에서의 자유였다. 선이는 은연중에 해야에게 의존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랑은 분명 그런 측면이 있다. 상대와 물리적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고, 심리적으로도 항상 같이 있고 싶은 마음. 그렇지만 잘 구별하지 못할 때 착각에 빠진 사랑은 서로에 대한 지배와 통제로 변질이 된다.
그런 미래는 책에 나오지 않지만 해야는 선이가 좀 더 자유로워지길 바란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매번 이야기한 말을 지킨다. 바다로 나가 바다 속으로 뛰어 드는 것. 자살처럼 보이지만 그만한 능동과 자유가 있을까 싶다. 이는 장강명 작가의 『표백』을 떠올리게 한다.
선이는 해야가 그렇게 떠난 후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낸다. 단순한 이별의 아픔도 고통스러운데 사별과 가까운 아픔은 존재를 무너뜨리는 힘을 지녔을 테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사람은 그 지역에 새로 정착한 “양이”라는 사람이었다. 해야와 함께한 장소의 이름대로 “작은 별” 카페를 만들던 선이의 노래와 분위기에 끌린 사람이다.
양이는 비중이 있으면서도 없지만 선이를 중심으로 둘 때 의미가 있는 시점을 제공한다. 양이는 선이를 처음 보았을 때 이런 말을 했다. ‘그는 내가 싸우지 못한 부분과 혼자서 싸우고 있었다. 난 그를 응원했다.’ 확장해서 보면 존재의 자유는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반대로 그런 고통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존재의 자유를 누린다고 얘기할 수 없다는 의미다.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견뎌낸 선이는 누구에게도 자기 개념을 종속 또는 의존하지 않은 모습에 가까워진다. “카페는 곧 선이 씨 자신이었다.”는 표현은 그에 대한 소설용 표현이다. 일반적으로는 “선이 씨가 카페 주인이다.”라는 표현을 썼을 테다.
그렇다면 선이는 누구와도 지내지 않는 사람이 되었나? 존재의 자유를 위한 고통을 지나온 사람의 모양새는 일반 사람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의 내용이 사투를 겪은 뒤 밴드 동료들과 지인을 카페에 초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해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의 말대로 해야는 사라진 것도, 죽은 것도 아니다. 판타지나 형이상학적이긴 하지만 선이는 분명 해야가 자기 속에서 살아 숨쉬며 함께한다는 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분명 죽었겠지만 소설이란 형식과 주제를 볼 때 이 정도 의미는 시적 허용처럼 넓게 바라볼 부분이다. 제한을 두지 말고 자유롭게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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