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반응형

 

[평점 6.5/10]

 

명성황후가 살해당하고 일본이 조선 및 대륙으로 진출한 발판인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진 1895년. 동아시아만큼 외관이 혼란스럽지는 않았지만 유럽은 내면의 격동이 진행 중이었다. 이전에는 다윈의 <종의 기원>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나왔고 이후로는 프로이트의 판이었다. 이들이 몰고 온 변화가 혁명적이었음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이런 와중에 허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머신>이 세상에 나왔다. 덧붙이자면 엥겔스가 세상을 떠난 시기가 1895년이었다.

 

책에는 웰스의 다른 단편들이 여럿 실려 있다. 그렇지만 주인공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보자. 우선은 작가 자신의 조명인 머리말이 인상 깊다. 1931년판에 붙인 머리말은 소설이 나온지 36년 후에 적은 글이다. 작가가 마지막에 H. G. Wells라고 적지 않았더라면 누군가의 추천사로 오해했을 법한 글이다.

 

웰스는 타임 머신의 창작 배경 등을 유쾌하게 소개하면서도 한 군데서 진지함을 보인다. 그것은 인간 진화에 대한 철학이 이전에도 있었다는 점이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개념은 산업혁명과 전쟁 등으로 인해 뿌리 박힌 인간에 대한 회의적 시각에 휴식을 준다고 요약한다. 이 점은 작가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 “나중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소설은 현실의 ‘나’와 시간 여행자의 여정 속 ‘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먼저 친구인 ‘나’의 시점에서 시간 여행자가 사람들에게 “타임 머신”을 소개하고 그들과 논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부분은 이제는 <백 투 더 퓨처> 등의 작품을 본 현대인에게는 시각적으로는 익숙하되 개념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내용이다. x, y, z축이 형성하는 공간에 시간이라는 축을 더한 네 축을 이야기하고, 시간이 공간의 네 번째 축인만큼 공간에서처럼 움직임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공간과 시간의 관계, 시간 탐험 후 위치에 대한 고민이 미약하게 해결된다.

 

어느 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시간 여행자가 늦게 나타난다. 옷은 엉망이 되어 있고, 고기를 폭식한 뒤 그는 자신이 미래에 다녀왔다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제부터 시간 여행자의 시점인 ‘나’로 진행된다.

 

시간 여행자가 도착한 미래는 802701년이었다. 그가 만난 인류는 과일만 먹는 엄격한 채식주의자 같았고, 남녀 간 외견 차이가 모호해졌으며, 멋진 집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살았다. 그들에게는 노동이 없었고, 사회적 경제적 투쟁도, 상업 활동도 없었다. 심지어 전염병도 없었다. 미래인류의 몸이 나약하고 지적 능력도 떨어지며 폐허가 된 건물들을 시간 여행자는 인류의 승리로 여겼다.

 

그가 현재 시대에 가졌던 관점은 이런 것이었다. “인류는 미래에 지식, 기술의 측면에서 발전할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완전히 지배하고 통제권 안에 둘 것이다. 세계는 높은 지성으로 서로 협력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개인의 신체, 정신, 사회적 능력 등은 완성될 것이고 이들로 인해 사회도 완전해질 것이다.” 시간 여행자는 이런 낙관적인 미래를 그렸다.

 

처음에 그는 이런 가치관과 미래관으로 자신의 눈으로 보는 미래를 해석했다. 예상과 엇나가는 현실은 나름의 이유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미래인들이 너무나 완벽했기에 신체가 약해졌고, 세상이 안정되었기에 용기나 에너지가 덜 필요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심지어 이런 낙관적 관점은 지하인을 인식한 때에도 나타났다. 이때 웰스가 시간 여행자의 입을 통해 당시 세대를 풍자한다.

 

“우리 시대의 문제에서 출발하면, 오늘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격차가 점점 벌어진 것이 그 모든 상황의 관건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불을 보듯 뻔해 보였습니다.”

 

“또한 부유한 사람들은 좋은 교육을 받아서 점점 세련되고 우아해지는 한편, 가난한 사람들의 상스럽고 난폭한 태도와 부자들의 간격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배타적 경향을 갖게 된 부자들은 이미 자신들을 위해 지표면의 상당 부분을 울타리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것은, 부자들의 경우 오랫동안 많은 비용을 들여 고등 교육을 받기 때문이고, 세련된 습관에 대한 유혹과 거기에 필요한 시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빈부 격차가 이렇게 벌어지면 계층 간 결혼이 촉진하는 계층 간 교류가 점점 뜸해질 겁니다. 그래서 결국 지상에는 쾌적함과 안락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진 자>들이 살고, 지하에는 <못 가진 자>, 즉 자신들의 노동 조건에 끊임없이 적응하는 노동자들이 살게 될 겁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당시 종교와 철학 위에 쌓인 인간 개념을 건드리는데도 시간 여행자는 이 “적응”의 개념을 낙관론에 남발한다. 사회구조적 문제가 있음에도 그것을 환원하거나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대하는 모습이다.

 

시간 여행자는 회고하는 과정에서 탐험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초기 가설이자 반진실임을, 잘못된 이론이었음을 수차례 이야기한다. 그가 자신의 오류를 깨닫는 건 우물 속에서 지하 종족인 몰록이 먹던 고기 덩어리의 실체를 알게된 때다. 이때부터 손바닥이었던 그의 낙관론은 손등의 비관론으로 전환한다.

 

시간 여행자의 현실 해석은 놀랍게 달라진다. 호기심이 없고 지적 능력이 5세에 불과하며, 창조성도, 노약자도 없는 지상인(엘로이)의 모습이 주체적 선택에 의한 좋은 적응이 아니라는 반응이다. 엘로이는 인간됨을 유지하는 고통과 위기가 사라지자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모든 면에서 “퇴화”했는데 무엇보다도 지성이 퇴화했다.

 

지성이 퇴화한 단적인 예시는 이들의 언어에서 드러난다.

“그들의 언어는 아주 단순해서 거의 대부분 구상 명사와 동사만으로 이루어져 있었지요. 추상 명사는 있다 해도 극소수인 것 같았고, 비유적인 표현은 거의 쓰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문장은 대개 두 낱말로 이루어진 단문이었고, 나는 지극히 간단한 명제밖에는 전달할 수 없었고 또 이해할 수도 없었답니다.”

 

몰록에 관한 설명은 그리 많지는 않다. 있더라도 추상적이다. 시간 여행자는 이들을 보면 구역질이 나는데, 이들은 비인간적이고 악의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나마 구체적인 모습으로 지성이 아예 사라졌다는 관찰과 몰록이 인간성의 상징인 금기 “인육 섭취”를 깨버린 점을 이야기한다. 엘로이와 함께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이었는데 몰록도 결국 현대 인간 이하가 된 것이다.

 

소설은 이후 시간 여행자가 몰록에게서 타임머신을 되찾아 현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으로 이어진다. 시간 여행자는 친구인 ‘나’에게 시간 탐험의 확실한 증거를 위해 3년 전 다시 여정에 나섰고 돌아오지 않는다. 책의 메인 파트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에필로그와 부록은 쿠키영상 느낌이므로 패스!)

 

1895년. 30세인 웰스가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자 그가 스스로 미숙한 글이라고 평가한 <타임 머신> 그가 바라본 현실은 어땠는지 정리를 해본다. 인류는 진화라는 놀라운 설명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을 오용한다. 눈앞에 전봇대가 있는데도 발견의 감격에 취해 달려간다. 근거는 산업적 발전, 지식적 진보, 그로 인한 풍요로운 생활이다. 전봇대는 당시 사회적 문제, 구조적 문제와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 여기는 인간관 등이었을 테다.

 

웰스는 콧대 높은 인간이 지식을 만나면 얼마나 더 편협해지는지, 맹점이 더 커지는지 지식을 무기로 오용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만큼 인간에 대한 비관론은 커진다. 웰스는 그에 대해 “현대의 심리적·생물학적 철학은 그런 고뇌에서도 달아날 길을 제공한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봐야할지 긍정적으로 봐야할지 가늠이 잡히지 않는다.

 

다만 웰스가 주는 한 가지 메시지가 있다. 고통, 위기, 잘못이 있는 삶이 인간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일들을 모르는 척 하지 말고 대처하는 편이 이롭다. 그것이 사회구조적 문제이든, 인간관계 속 갈등이든 말이다. 나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건 나를 강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고 진화하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내가 사는 사회, 모임, 또는 나 자신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타임머신>은 제목의 첫인상에 비해 지루하다. 그리고 작가의 말대로 미숙하다. 802701년은 심하지 않았나 싶다. 보통 이런 미래를 다루는 소설을 유토피아 소설이나 디스토피아 소설로 부른다. 이런 책은 보편적으로 작가의 시대를 풍자하는 의도로 쓰여진다. 개인적으로 여태 읽었던 디스토피아 소설은 다 재독 이상 했는데, <타임머신>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왜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의 작품이 유명한지를 적극적으로 반증하는 작품이다. 역사적으로 의의는 있겠지만 종말에 관한 디스토피아 소설은 <더 로드>를 읽는 게 낫겠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