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야』구버전이다. 재인 출판사에서 2020년에 새롭게 나왔다.
“
아직 이해를 못하는군.
과거는 버려.
그렇지 않으면 승부에서 이길 수 없어. 이기고 싶지 않아?
”
1995년 1월 17일. 일본 고베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20세기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에 다음 가는 지진이었다고 한다.
《환야》는 이 고베 대지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뤄졌다. 장례식엔 외삼촌만 참석했다. 그마저도 아버지가 그에게 진 빚을 청산하기 위해 보험금을 노리고 있었다. 약아빠진 외삼촌… 이때 땅이 심하게 흔들리며 건물이 무너졌고, 마사야는 잔해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외삼촌을 본다. 그리고 돌로 그의 머리를 내리친다.
목격자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린 마사야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그의 모든 행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것 같아 보이는 그 여자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신카이 미후유. 마사야는 피난센터 주변에서 성폭행당할 위기에 처해있던 그녀를 구한다. 미후유의 신비한 매력에 빠진 마사야는 그녀의 제안에 따라 함께 도쿄로 건너가고 이때부터 그녀의 말을 따라 행동한다.
미후유의 뒤에서 서포트를 해주며 그녀와 행복한 생활을 꿈꾸던 마사야. 그러나 그녀와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음을, 그가 그녀의 과거를 하나도 알지 못함을 깨달은 순간부터 몰래 그것을 캐내기 시작한다.
한편 유독 미후유의 주변에서 실종, 살인미수 등이 일어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형사 가토도 물밑 수사를 시작한다.
서서히 조여오는 압박에도 사업을 확장하고 재벌과 결혼한 미후유. 그녀의 과거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환야》는 치명적인 매력을 띤 팜므파탈에 빠진 사람들 주변에 사건이 일어나 그녀의 정체를 파헤쳐나가는 소설이다.
“환상 속의 밤”이란 의미의 환야는 결말부에 미후유의 입에서 그녀의 입장으로 나온다. 하지만 소설 전체는 “팜므파탈과의 환상적인 밤”으로 남자인물들과 독자를 인도하는 듯하다. 작가는 마치 작품 자체가 팜므파탈인 듯 그 옷을 한 겹씩 천천히 벗긴다. 그 속에 무엇이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궁금해하는 마음을 끝까지 증폭시킨다. 책의 마지막을 넘어 덮을 때 이제야 내 방에 들어온 햇살을 느낄 정도로.
그러나 신카이 미후유의 배경은 그리 환상적이지 않다. 지극히 현실적인 그녀는 사람의 어두운 면을 명확히 알고 있다.
“세상 사람들 눈에 진실은 보이지 않아.” 《환야 1》, pg.352
사람뿐만이 아니다. 일상에 빛은 없다. 착각해서도 외면하고 부인해서도 안 된다.
“잘 들어. 환한 대낮 길을 걸으려고 생각하면 안 돼. (중략) 우리는 밤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설사 주변이 낮처럼 밝더라도 그건 가짜야. 그런 건 이제 포기할 수밖에 없어.” 《환야 1》, pg.264-265
그녀에게 있어 과거나 현재나 어둡기만 하다. 어두움에 있었던 과거와 어둠에 있는 현재이기에 그저 살아가는 방법을 추구한다.
“가령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다 해도 나는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아. 다만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나갈 뿐.” 《환야 2》, pg.351
미후유의 마법같은 매력은 어두운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한다. 그렇기에 그 매력에 빠져버린 사람은 누구나 결말부와 같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환야》는 지금껏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 중 《변신》과 더불어 가장 어두운 책에 속한다. 정반대엔 #나미야잡화점의기적 이 있다.
#위험한비너스 와 같이 팜므파탈이 나와 여성독자들이 읽을 만한지는 모르겠다. 중고서점이나 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지만 읽어보면 좋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