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가 잊는 사실이 있다. 내가 사람(인간)이라는 점이다. 자명한 이 사실에 나는 종종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잊을 때가 더 많은 듯하다.
얼마전부터 읽고 있는 책이 있다. 〈디자인의 디자인〉이란 책이다. 무인양품의 advisory board 멤버 중 하나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하라 켄야씨가 썼다. 이 책의 머리말에 이런 내용이 있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정의하거나 상세히 적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때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전혀 모르는 것으로 가정하고, 그 실체에 도전해보는 것이 대상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인식하게 해준다.”
그는 이 과정을 지나며 우리가 무언가를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인식이 후퇴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도리어 더 ‘현실적인 존재로서의 그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소개한다.
비슷한 의미의 말이 생각났다.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당시의 수사학자들, 탐구가들을 적으로 만든 한 마디다. 그러나 뼈가 있는 말이다.
모른다고 가정하거나 인정하는 건 어렵다. 실제로 우린 무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각한다. 그 사이에 “부분적으로”라는 말이 양 옆에 괄호가 달린 채로 있음을 안본다. 대신 “온전히”란 단어로 덮어쓴다.
〈아몬드〉는 이런 착각에 질문을 던진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반대로 ‘무엇이 사람인가’를. 너무나 당연한, 자명한 사실을 재검토한다. 결함이 있는 선윤재의 시점으로.
재미있는 점은 우리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알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인문학 서적과 과학 강의 그리고 방송을 통해 사람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단지 ‘너’에 대해서 알려 하지 않을 뿐이다. 사람이란 범주 안에 있는 너 자체를 알려고 하기보다 그 범주를 알아, ‘너를’ 분석하고 판단하려 한다.
이러한 연역적 착각에 빠진 것은 성가대원과 급우 같은 개인부터 크리스마스이브 사건을 다루는 언론 같은 집단까지다. 이 허구적 르포르타주에서 너의 실체를 진실로 알려고 하는 사람은 선윤재와 심박사뿐이다.
선윤재는 인간이 아니었다. 세상은 그 점을 확실히 못박았다. 편도체가 작아 감정을 모르고, 공감하지 못하는 비인간으로 규정지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란 퍼즐조각을 모아갔다. 먼저 인간이 된 심박사에게 생각을 투명하게 드러냈다. 조각을 유심히 살피며 만지던 때 그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은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윤재는 세상을 이렇게 진단한다. “사람들은 곤이가 대체 어떤 앤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단지 아무도 곤이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들여다보지 않는 자가 세상이다. 동의어로 인간이 아닌 자 또는 진짜가 아닌 자이다.
우리는 점점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 풍조 속에 살고 있다. 도리어 들여다봐주길 바라는 행위를 한다. (곧 있을 서평을 참고하길). 겉으론 태연히 그렇지 않다고 표현하면서. 그리고 이미 알고 있다며 무관심으로 대응하면서.
〈아몬드〉가 쏘아 올린 질문은 오늘 나를 누군가에게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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