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읽었는데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책이 많다.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이 특히 그렇다.
어린 때 읽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데 읽었다는 기억만 얘기할 수 있다.
그러다 하나씩 떠오른다. 양철통, 마법사, 조커 카드…
소재는 조금 기억나지만 이야기는 설명하지 못하겠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렇고, 오즈의 마법사도 그렇다.
그래서 소설에 관심이 생기고 책을 구매하기 시작할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먼저 샀다.
오즈의 마법사는 또다시 잊혀졌다가 이번에 내 손에 잡혔다.
1900년에 나왔다는 이 책은 마치 1700년대에 쓰인 듯한 느낌을 준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들려주는 구전동화처럼 따뜻하고 단순하고 교훈적인 내용이 먼저 마음에 들어와서다.
인물의 심리를 정밀하게 묘사하는 요즘과 비교했을 때
‘뭐 이렇게 단순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 진행과 인물들의 반응이 단순하다.
도로시의 숙모와 삼촌이 텍사스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배경도 시대를 한참 전으로 추측하게 한다.
이야기는 타지에 떨어진 도로시에게 한 명씩 일행이 붙으며 진행된다.
원피스의 루피에게 동료들이 한 명씩 추가되는 걸 생각하면 된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위대한 마법사인 오즈를 찾아간다.
허수아비는 뇌, 양철 나무꾼은 심장, 사자는 용기를 얻고자 간다.
도로시만 간단하게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물리적인 소원이다.
저 세 명은 맨날 “내가 ~를 가졌으면"이란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자기가 뇌, 심장, 용기가 없기에 지금 이 모양이라며 오즈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 대사가 나올 때마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아이언맨이 스파이더맨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수트 없이 아무것도 아니면 더욱 가지면 안 돼.”
정작 오즈를 찾아가고, 서쪽 마녀를 무찌르러 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이미 가진 용기와 지혜와 따뜻함을 보여준다.
사기꾼 오즈는 그 사실을 알기에 물질을 그들에게 주며 암시를 넣는다.
완벽한 플라시보 효과다.
이 소설은 도로시가 등장한 순간부터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미친듯한 단순함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이 단순함은 꽤나 위험한 면을 지닌다. 허수아비가 뇌를 가지고 싶다고 여기게 된 계기를 살펴보자.
어느 날 들판에서 까마귀를 쫓는데 늙은 까마귀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뇌만이 이 세상에서 가질 만한 가치가 있어.”
그 말을 허수아비가 듣자 그는 자기에게 뇌가 없기에 불행하다고 믿는다.
팔랑거리는 귀가 얼마나 위험한지 새삼 느낀다.
사자는 비교의 왕이다.
다른 동물들이 자신을 동물의 왕이자 맹수의 왕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오즈가 아무리 “난 네가 이미 용기를 가졌다고 믿는데. 네게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야. 생명이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위험한 것을 대하면 두려워하거든. 진정한 용기는 겁이 나더라도 위험과 마주치는 데 있고, 너는 그런 종류의 용기를 많이 가지고 있단다.”라고 말해도 두려움을 잊을 정도가 아니면 용기가 아니라고 대답한다.
완벽주의자는 이렇게 자기를 힘들게 한다.
나중에도 자기가 용기 있는 사자라는 점보다 다른 동물들보다 덜 용감하지 않다는 데 흐믓해하니 이건 고질병이다.
양철 나무꾼이 이 중에서 그나마 낫다. 자기가 심장이 없기에 더 신중하게 산다.
심장이 없기에 친구가 필요한 자들을 도와준다.
다른 인물들이 뇌나 용기가 없어서 불행하다고 할 때 심장이 있으면 불행을 견딜 수 있다고 표현한다.
그래도 등잔 밑 좀 살펴 보았으면 좋겠다.
이런 일행들에게 도로시는 참 멋진 말을 한다.
“난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의 네가 좋았는데.”
왠지 조만간 시/에세이 부문에 책으로 하나 나올 듯한 대사다.
허나 전에 도로시가 허수아비에게 “넌 뇌가 없어서 모를거야”하고 말한 걸 떠올려보면 도로시의 인격이 의심된다.
오즈가 바구니를 타고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순간에도 바로 “잘 가요!”하고 말하는 걸 보면 도로시 이 친구… 뭔가 있다.
도로시의 대사와 상황을 정리해보면 이 친구의 자존감을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음을 본다.
상대방을 띄워 주면서 할 말은 다 하는 모습.
반드시 에메랄드 시에 갈 거라는 강렬한 목표 의식.
사자가 구조되었을 때 기뻐하는 동료 의식.
그리고 아름다운 도자기 공주를 선반 위 피규어로 삼으려는 이기성과 인격 무시까지.
어쩌면 ‘완벽한 주인공은 없으니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라’는 저자의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책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속 최고의 팜므파탈, <환야> 리뷰 (0) | 2018.12.25 |
---|---|
이것만 있으면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 〈수상한 레스토랑 세컨즈〉 리뷰 (0) | 2018.12.24 |
세 나라에서 출간된 미스테리 스릴러, 〈옆집의 살인범〉책 리뷰 (0) | 2018.12.20 |
여섯 사람의 신체부위로 된 시체가 발견되었다. 빠른 템포의〈봉제인형 살인사건〉리뷰! (0) | 2018.12.19 |
17년 1월 중순 현재 읽고 있는 책s 리스트 (0) | 2017.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