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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개념

(현대인들의 현재를 즐기자, 현재 나를 위한 선택)


버스에 올랐다. 친한 형과 오락실 승부를 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가 사는 지역으로 가는 단 한 대의 버스였기에 타는 사람들도 많았다. 내가 탔을 때는 빈 자리가 없었기에 서서 가야했다.


경동시장에 도착했다. 주말 오후는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시고 돌아가는 타이밍이다. 역시 많거나 무거운 짐을 들고 타시는 분들이 대다수였다. 60세 이상으로 보이는 분들이었다. 자리는 다 찼기에 출구 너머의 빈 공간까지 사람들이 탔다. 


다음 정거장으로 가는 길에 옆에서 소리가 났다. 어린이 두 명과 그들의 부모님이 있던 자리였다. 한 아주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리 좀 앉자. 할머니 무거운 짐 들고 있는데 비켜줘야지!"


이 말에 부모는 네네 하며 자리에 앉아있던 아이를 일으켰다. 드디어 자리에 앉게 된 자칭 할머니는 당연히 이래야지 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짐을 정리했다.


순간 '무슨 이유로 양보를 하지?'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자칭 할머니의 논리는 '짐도 좀 많은데 내가 할머니니 비켜주는 것이 당연한데 한 정거장을 지나기 전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느냐'였다. 감정적인 반발이 들었다. 







유교적 문화를 차치하더라도 양보를 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고 또 다양할 것이다. 다만 주장을 펼치며 어떤 행동을 요구할 때에는 명료하고 합리적인 이유는 물론 상대방에 대한 태도 또한 존중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 자칭 할머니께서는 자신의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부모와 자녀들을 교육하려했다. 교육한다는 것도 그 필요성을 생각해봐야겠다. 그러나 가르친다는 것은 일시적인 자기 만족을 위해서는 안되고 또 배우는 사람의 마음이 좋은 마음으로 납득할 수 있어야 잘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고 본다. 할머니께서는 그 부분에서 실패하신 듯하다.


양보를 강요/요구받은 때에 물론 나는 자리를 비켜줄 것이다. 그런데 그 행동 뒤에 있는 믿음과 근거는 무엇일까? 무엇을 위하여 나는 양보를 할 것인가?


먼저 질문에 대한 점검을 해보았다. 무엇을 위하여 양보를 하는가에 대해 '왜 양보를 하는가?'라는 질문이 들어왔다. 두 가지 질문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무엇을 위한다는 점은 현재나 미래의 이득을 내포한다. 양보를 해서 현재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내재적인 보람과 외재적인 칭찬일 것이다. 양보를 해서 미래에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모호하지만 나/가까운 타인도 그렇게 나이가 들었을 때 이 문화가 지속된다면 자리를 얻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나 미래의 이득은 꽤 합리적이고 때론 미덕의 지속이라는 점에서 양보의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계산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득을 제외하고는 어떤 이유로 양보를 하는 것일까? 


그전에 "많거나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이나 노약자에게 양보를 해야한다"는 주장은 명령이 아닌 권고의 차원이어야 한다고 본다. 명령은 질서를 낳겠지만 반발도 품게되고, 권고는 반발은 적겠지만 질서가 세워지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권고의 차원이어야 함은 미덕의 지속성은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왜 양보를 하는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답만을 줄 수 있다. 나는 앞서 말한 현재나 미래의 이득 이외에 몇 가지 이유를 갖고 양보를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현재 내가 그들과 같이 짐이 많거나 무거운데 힘이 조금 버거운 사람이라면?'이란 생각을 갖고 한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나라면 어떻게 해주길 바랄까?' 또는 나는 나의 시선을 유지한 채 그들이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오래 걸었더니 힘이 드네', '짐이 많은데 갈 길이 머네...' 등 이런 마음이 느껴질 때 양보를 한다. 또다른 이유로는 자리를 요구하는 사람의 태도가 내 마음에 합했을 때 양보를 한다. 경험상 반 정도의 어른들은 부탁하는 어조로 자신을 낮춰서 말씀하신다. "저기 총각. 내가 무릎이 아파서 그러는데 혹시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자발적으로 양보를 해드리지 못한 죄송함이 들면서도 그렇게 부탁해주시는 모습에 감사함을 느낀다. 누군가는 이런 태도를 보며 더 나은 문화를 만드는 행동의 동기를 얻지 않을까?







요즘이 가끔이 아닌 빈도로 젊고 힘이 넘쳐 보이는 청년들이 노약자석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아마 그들 중 몇은 직업 상 수고로 인한 피곤함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양보를 생각할 겨를이 없이 창에 머리를 대게 되는 것이다. 일부는 힘이 약한 자에 포함될 것이다. 또다른 일부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나도 힘든데 무슨 양보냐.' 


현대인의 특성 중 자기중심적인 경향의 확대가 있다. 자신을 위한다는 점에서 이전에 타인에 의해 타인의 삶을 살았던 것보다 좋다고 본다. 하지만 만약 그 태도가 자신과 동등하게 '사람'이라는 점을 무시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면 좋진 않다고 본다. 가치관의 차이로 보고는 있지만서도 현재를 즐기는 것과 현재 나를 위한 선택은 가끔은 현재 다른 사람을 위한 선택과 충돌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산다고 볼 것이 아니라 결국엔 나의 인생을 살면서 나를 위한 선택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미덕은 강요할 수 없다. 하지만 미덕을 생각해보지 않는 사람은 그 자신의 인생에 타인의 미덕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본다. 양보를 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다. 양보를 하지 않는 이유도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한 수 앞을 더 생각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럴 능력이 있음에도 환경의 변명이나 의지적으로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틀렸고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기보다 더 괜찮아 보이는 행동을 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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