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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책을 일찍 읽었다.

오후에 출근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요즘 여러 권을 읽고 있어서 <취향을 설계하는 곳, 츠타야>를 간과한 경향이 있다.

아마 그 배경에는 읽고 있는 여러 권 중에 <츠타야, 수수께끼>가 있어서 그런 듯 싶다.



오늘 챕터의 제목은 <사람의 행동은 쌓이고 쌓인 것>이다.

가슴을 찌르는 말이 포함된 챕터인데 요약해보면 이렇다.


마스다 씨는 우리 행동의 비하인드를 소개한다.

'이 정도면 돼'라는 고정관념이 있다는 거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적당한 매일을 살기 위해 타협하는 점이 여러 개 있다.

타협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생각을 시작하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나아가는 건 우리의 일상에 휴식과 행복을 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정도면 돼'라는 고정관념에 빠질 때 사람이 보이는 명백한 모습이 하나 있다.

그것은 수준 높은 사람을 피하고 자신과 비슷하거나 자신에게 맞장구쳐주는 사람과만 어울리는 것이다.

무언가 나보다 뛰어나서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을 보면 조금만 타협하려는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을 찔러서 차라리 피하는 선택을 한다. 

그들을 만나면 우리가 지키고 있는 생각과 습관과 자존심이 무너질 것을 알기에 그들과의 접촉을 피한다.


마스다 씨는 이 글을 쓴 날 자신보다 나이가 젊지만 오로지 고객만을 생각하는 한 청년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 청년을 볼 때 마스다 씨도 '좌절'을 겪었나보다. 

하지만 마스다 씨는 좌절에 빠지지는 않았다. 좌절이 주는 느낌이 너무 싫지만 그럼에도 그런 사람을 만나려고 찾는다.





내게는 약간 마조히스트적인 성향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좋아한다. 누구나 쉽고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멀리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내 몸이 지치고 힘들고 마음도 좌절을 겪는데도 끝까지 간다. 무슨 기대가 있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그래서 내 삶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양상이었다. 그게 어느 정도 되니 지쳐버렸다. 세상과 타협을 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모습이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말이 마음에서 올라온다.


그 마음에 동의하는 순간부터 도전적인 모습은 사라졌다. 뚝심은 고집이 되었고 삶은 매너리해졌다. 어느 것도 정하지 않은 채 모든 가능성을 가능성으로만 남겨두었다. 시간이 가는데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또는 움직여야 했기에 생각을 멈췄다. 삶은 이분법의 극단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처럼 양 끝 지점을 왔다갔다 했다.


관계에서도 그 일이 일어났다. 내게 쓴소리를 하는 사람을 마음 속으로는 환영하면서도, 나와 비교될 정도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사람과의 만남을 주저했다. 그들이 하는 말을 '응 그래 그건 너 길이야'라고 흘려버렸다. 도전은 내게 상상 속 동물에 불과했다.


이제 내가 삶이란 길에서 중대한 선택을 하는 때가 온다. 이 뒤에 일은 누구나 그렇듯이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선택의 기준을 성장에 맞춰야 할 테다. 그 선택은 고통스러울 거다. 타인과의 비교, 꺾여지는 기대, 절망과 좌절의 연속 등으로 내 선택을 후회하거나 재고려하는 마음이 올라올 것이다.


그런 때에도 나를 지탱할 수 있게 내 성장에 맞는 선택을 해야겠다. 그걸 위해서는 오늘이라도 내게 쓴소리를 해주는 사람들을 만나야한다. 내게 좌절을 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직접 만나지 못한다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들에서 좌절을 맛보아야 한다. 이 마조히스트 성향이 괴팍하더라도 분명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과 다를 것이고, 나는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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