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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무네아키 씨의 <취향을 설계하는 곳, 츠타야>에서

오늘 읽은 파트는 "절망과 가까운 희망"


마스다 씨는 

인재 육성, 돈 벌기, 멋진 공간 만들기, 새로운 일 펼쳐보기 등

하고 싶은 일이 많아 벽에 부딪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에 한정된 시간과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현실을 보니

절망의 마음이 든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시간과 돈이라는 물질적 손해와

화나 침울함이라는 감정적 손해와 더불어

외부로부터 신용을 잃는다는 사회적 손해를 이야기한다.


이 외부로부터 신용을 잃는다는 말을

적은 경험이지만 내 입장에서 돌아보면

남들이 평가하는 내 사회적 가치가 감소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서른을 앞둔 내게

공용사무실의 어른들은

젊다고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여유의 의미를 부여하시면서도

"요즘 청년들은 돈 되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도 일을 하려하지 않는다"

라고 간접적으로 꼬집으신다.


그저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

원래 전공과 다른 디자인 분야로 

3년의 외도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비전을 생각할 때이고, 선택할 때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더 늦지 않아야한다고 말씀하셨다.


명목상 프리랜서로 아주 가끔 외주를 받아서 살아가는데

전공도 디자인이 아니고, 

현재 하는 일이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일반 청년들과 같이 기업에 공채로 들어가는 건

이미 나이에서 마이너스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아주 구체적인 사회적 가치의 감소를 예로 드시면서

나의 절망을 명료하게 드러내셨다.


마스다 씨는 자신의 절망과 같은 상황을

칠흑 같은 어둠이자

우울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하며

그것에 내몰리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절망의 상황에서 가까이에 있는 희망을 본다.


희망은 나도 모르는 때에 

일상적인 활동을 하다가 찾아오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찾아온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적확하다.


"결국 희망이라는 녀석은 절망의 늪에 선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은혜로운 생활이나 능력 이상의 일에 도전하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까?"


절망을 느낄 때 

단어 그대로 희망의 단절을 느낀다.

희망의 부재.


빛과 어둠과 같은 이 두 단어는

동전의 양면처럼 가까이에 있다.


나는 그동안 무력하게 살았고

재능만 믿고 살았기에

절망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었다.


재능의 효력이 떨어지고

한 방울도 보이지 않을 때

절망은 내게 찾아왔다.

무기력은 거기에서 나왔다.


마스다 씨의 말을 다시 살펴보면

능력 이상의 일에 도전하고 있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는 의미다.

절망 속에 있다면,

내 능력의 한계와 상황의 흉조를 보고 있다면

거기에 집중하기보다 그 이상의 것을 해보는 게 필요하다는 말이다.


눈 딱 감고.


그래서 나는 블로그를 한다.

10여 년 전부터 계획만 했던 이것을

이제는 유튜브의 시대, SNS의 시대일지라도,

블로그가 내 능력 이상의 일임을 보았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가 아니라

할 수 있는 데를 넘어선 곳까지를 목표로

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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